세뿔투구꽃이었다. 그렇게 찾으려 애를 써도 찾지 못했던 이름이 TV ‘유 퀴즈 온 더 블록’ 종자은행 편에 보라색 세뿔투구꽃이 언뜻 스쳐 지나가며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너무 반가워 얼른 이름을 메모장에 적었다. 세뿔투구꽃, 세뿔투구꽃이었다. 추석이 막 지나고 나서다. 사진 찍은 날짜를 보니 2021년 9월 30일에 찍은 사진이다.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시간을 내서 여행을 가자는 약속을 한 뒤로 친구와 찾게 되는 곳이 제주도다. 관광이라기보다는 쉼을 목적으로 산책하듯 걷다가 맛있는 것을 먹는.
양떼목장을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꼭 가야하는 것도 시간 약속을 한 것은 더더욱 아니어서 빗방울이 떨어지다 말다 하는 날씨에 갓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몸을 풀고 있었다.
너른 배추밭 뒤로 울창한 삼나무 숲을 보며 우산도 없이 숲속으로 들어갔다. 약도를 보니 한 바퀴를 돌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산길이었다. 흐린 날이라서 그랬는지 어스름했다.
쭉쭉 하늘로 뻗은 삼나무를 보며 사람 사는 곳이 아닌 몽환적인,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닐까하는 두려움까지 엄습했던 곳엔 산책하는 사람이 없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맑은 날이라고 해도 햇볕이라곤 들 것 같지 않은 어두운 곳에 보라색 꽃이 반가워 친구와 함께 찍었던 꽃이 세뿔투구꽃이었다. 우리 고향에서는 보지 못했던 꽃이다.
검색해보니 ‘세뿔투구꽃’은 전라도나 경상도 아래 녘에만 있는 꽃이었다. 그래서 제주도 삼나무 숲에서 만날 수 있었나싶다. 종자은행에 세뿔투구꽃이 나온 걸 보면 지금은 어디서나 귀한 꽃인 모양이다.
삼나무 숲에서 걷다 풀이 우거진 곳에서 만났다. 만날 때마다 찍었다. 어느 곳에서는 통통한 흑곰 같은 벌이 세뿔투구꽃 속을 파고들기도 했는데 그 모습을 찍지 못해 아쉽다.
운이 좋았던 것이다. 꽃과 열매는 시기가 잘 맞아야 만날 수 있다. 그곳에 세뿔투구꽃이 싹이 트고 씨를 맺었다 해도 꽃 피는 걸 보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