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논에 피도 안 난다.”라는 ‘피’는 날이 가물거나 땅이 나빠서 억세고 번식력이 좋은 피조차도 자라지 못할 정도라는 의미로 쓰이는 ‘피’가 이 벼 같은 ‘피’다.
“피죽도 못 먹었냐?” 기운이 없고 비실비실한 사람에게 했던 말이다. 벼가 재배되기 힘든 산간지나 북부지방의 냉수탑 또는 냉수가 들어오는 논의 입구나 샘둘레에서 재배했었던 구황식물이다.
쌀과 달리 맛이 없어 그랬을까. 아버지에게 피는 잡초였다. 아버지는 논에 벼보다 웃자라는 피와 전쟁을 벌이셨다. 지금쯤이다. 김 매기때 뽑아내지 못한 피를 벼를 베기 전 잘라내시고는 하셨다.
피는 사료용으로 쓰인다. 줄기와 잎은 작물의 줄기 중에서도 연해서 가축의 사료에 적합하다. 그때 논에서 잘라내신 피로 아버지는 소죽을 끓이셨을까. 논두렁에서 베어낸 소꼴보다 논에서 벼처럼 자란 피가 소여물로는 최고가 아니었을까 싶다.
지난주에는 보이지 않던 피가 이번 주엔 누렇게 익어가는 벼보다 키가 크다. 꽃이 피고 영글기 전까지는 벼와 구분되지 않았다. 통통 영근 각진 씨방이 야물다. 껍질을 벗겨놓으면 쌀알 크기와 비슷할 것 같다.
주말농장에 피는 벼보다 한 뼘은 더 크다. 피가 많은 논은 벼도 안 영근다더니 그렇겠다. 벼가 익어가는 논이라기보다는 피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벼를 덮고 있다. 아버지가 하셨던 것처럼 피를 잘라내지 않으면 피 반 벼 반이겠다.
잡초는 아침에 뽑아도 어느새 또 자라 농작물보다 먼저 자리 차지를 한다는 엄마 아버지의 하소연이 들리는 듯 하다. 뽑아도 뽑아도 어느새 자라 김맨 흔적을 가려버리는 잡초 중에 하나가 사진 속에 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