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
우리 동네에서는 붉은 수수를 산밑 밭 가장자리에 울타리를 만들 듯 심었다. 참나무와 경쟁이라도 할 듯 쑥쑥 자라던 수수 대는 꼿꼿하게 꽃을 피우다 붉게 수수가 익어갈 무렵엔 제 이삭이 버거워 고개를 떨구고도 세찬 비바람엔 애쓰고 있던 허리가 꺾이고는 했다.
푸른 옥수수 대와는 달리 붉은 수수 대에는 호랑이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잡고 올라가다가 수수밭에 떨어져 축축 늘어진 수수 잎이 호랑이 피로 얼룩졌다는 전설로 수수밭을 지나갈 때면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수수 잎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는 했다.
소여물을 썰던 작두에 잘라 대나무 같은 껍질을 벗겨 씹어먹던 달디단 옥수수 대보다 더 달다는 수수 대를 꺾어 먹어본 적이 없다. 수수밭엘 들어서기도 전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호랑이가 나타날 것만 같아 수수가 붉게 익어가는 가을엔 더더욱 수수밭엘 가지 않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엄마가 수수를 따시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언제 꺾어오셨는지 잘 말려둔 동글동글 구슬 같은 수수를 광에서 꺼내는 오시는 날이 있었는데 그 날은 사남매 생일때나 명절때였다. 열 살때까지 생일때마다 수수팥단지를 먹으면 액운을 막는다는 전설을 철썩같이 믿으셨던 엄마다.
수수로 만든 새알만 한 붉은 속살을 성글게 빻은 팥에 굴린 그 떡이 수수팥단지였다. 우리 사남매는 10살 때까지 생일 때마다 수수팥단지를 먹었다. 밤을 꼬빡 새며 만들어주시던 수수팥단지를 먹고 기운찬 호랑이 기운을 받아 별 탈 없이 잘 자랐던 것이다.
소죽을 끓이고 난 사랑방 아궁이에서 타다 남은 참나무 밑불을 화로에 담아 그 화롯불에 수수부꾸미를 솥뚜껑에 들기름을 발라가며 지글지글 구워 주셨다. 둥글게 편 수수 반죽이 노릇노릇해질 무렵이면 팥소나 녹두소를 넣어 싸 주셨는데 그게 수수부꾸미였다. 수수팥단지랑은 또 다른 맛이었다.
이젠 주말농장, 약초농장에 있는 쭉쭉 뻗은 수수 대가 두렵지는 않다. 옥수수 대보다 조금 더 붉은 수수 대가 그 옛날 수수밭에서 보던 호랑이 피가 말라붙은 것 같은 모습은 아니라서다. 이제야 수수밭에 수수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직 수수꽃은 보지 못했다.